[서울=뉴스핌] 양진영 기자 = 뮤지컬배우 배수정이 한국에서 첫 라이선스 공연을 올린 '식스 더 뮤지컬'에서 주연으로 우뚝 섰다. 앙상블부터 15년간 뮤지컬 외길을 걸어온 그의 잠재력이 이틀에 한 번 꼴로, 무대에서 터져나온다.
배수정은 최근 진행한 뉴스핌과 인터뷰에서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공연되는 '식스 더 뮤지컬' 무대에 서는 소감을 얘기했다. 헨리 8세의 여섯 왕비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공연에서 그는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역으로 무대에 선다. 이혼-참수-죽음-생존을 오가는 왕비들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한 결말을 맞았던 캐릭터다.
"처음부터 앤 불린, 아니면 하워드 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둘 다 참수당한 왕비죠. 하워드는 여섯 중에 가장 어린 나이였다고 해서 접었지만요. 저희 퀸들이 생각보다 다들 나이가 많아요. 처음엔 여자 12명이 모이니 접시가 와장창 깨지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웃음) 우리끼린 전우애 같은 게 생겼죠. 안무 사전연습부터 시작해서 연습이 정말 강도가 세서 미워하거나 견제할 시간도 없었어요. 서로 막 북돋워주고 박수쳐주고 안아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의상도 정말 갑옷같아요. 진짜 전장에 출전한다는 느낌으로 무대에 오르죠."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배수정 뮤지컬 배우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티움에서 진행된 뉴스핌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04.28 pangbin@newspim.com |
뮤지컬 '식스'는 튜더 왕조 헨리 8세의 여섯 왕비들의 역할을 부여받은 배우들 6명이 무대에 오른다. 각자 주제곡을 부르고,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되다보니 단 한명도 공연 내내 퇴장을 할 수 없다. 배수정은 "한 명 노래한다고 누가 빠지는 게 아니라 뒤에서 다들 얼마나 노력해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든든한 존재들이 됐다"고 털어놨다.
"1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노래하고 안무를 하면 탈수가 올 수 있을 정도로 땀이 정말 많이 나요. 다행인 건 힘들긴 힘들지만 재밌고 에너지를 관객 분들께 받아가는 게 있어서 끝나면 와! 하는 기분도 들죠. 그래도 덜 힘들게 할 수 있는 건 제가 앙상블 경력이 굉장히 길잖아요. 공연 3시간 동안 합쳐봤자 30분도 안나온 작품도 있고 퀵체인지 하고 뛰쳐나가서 하길 오래 해보니 생각보다 지구력이 길러진 듯해요. 처음엔 좀 긴장도 했지만 모르는 사이에 구력이 쌓인 것 같아요."
지난 2012년부터 약 10년이 넘는 기간, 배수정은 다양한 대극장 뮤지컬 작품에서 앙상블로 무대를 빛냈다. '황태자 루돌프' '모차르트!' '카르맨' '엘리자벳' '맘마미아!' '레베카' '렌트' '물랑루즈!' 등 유명한 작품들을 거쳐왔다. 최근작인 '물랑루즈!'에서는 조연 아라비아 역으로 고난도 댄스와 노래, 비중있는 역할을 소화했다. 이번 오디션에서는 딱 맞는 이미지와 노래, 말투가 해외 프로덕션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불린과 하워드를 놓고 고민하다가 나이 때문에 불린으로 맘을 굳혔어요. 프로덕션에서도 저를 불린으로 일단 붙여주셨는데 2차 오디션 볼 때는 클레페도 해달라고 하셨죠. 클레페와 불린 둘 다 3차에서 요청하셨는데 최종에서 불린을 더 많이 보시더라고요. 제안은 정말 기분 좋았지만 짧은 기간에 준비해야 하는 부담이 컸어요. 그렇다고 엉망진창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 클레페 하는 김지선 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한편으론 제 인상이 굉장히 강해보이나보다 싶기도 했고요. 거기에 불린의 악동같은 느낌을 함께 보신 것 같아요."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배수정 뮤지컬 배우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티움에서 진행된 뉴스핌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04.28 pangbin@newspim.com |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은 무대에서는 굉장히 재기발랄하면서도 약간 말괄량이같은, 마이웨이 이미지가 도드라진다. 실제 역사에 기록된 바도 그렇지만 앤 불린은 워낙 소설이나 영화, 연극, 오페라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진 덕에 많은 이들에게 친숙하기도 하다. 결국 불륜을 저질러 참수당한 결말마저도 그렇다.
"원래 성격이 불린 같은 면이 있는데 잘 안나왔었어요. 희한하게 불린의 노래와 표정, 개구진 느낌이 연습하면서도 정말 재밌었죠. 제 퉁명스러운 말투가 대사에 딱 드러날 때 다들 막 웃는 거예요. 지금도 연습할 때 불린 같단 얘길 많이 들어요. 진짜 나를 꺼내볼 수 있는 역할을 만난 셈이죠. 정말 신나고 하루에 세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불린은 굉장히 자주적이고 자기 생각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나답게 행동했을 뿐인데 주변에서 지탄받은 타입이죠. 지식과 유머를 갖춘 여성이었고요. 지금 태어났다면 뭐든 했을 것 같아요. 연출은 헨리를 만나서 안타깝다고 할 정도였죠."
다른 것보다도 10년이 넘게 뮤지컬 무대 한 길을 파온 배수정에겐 '식스'로 주연급에 발돋움한 이 상황이 감격스러울 법하다. 그는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무대에서 책임지는 양은 주연과 달랐다. 아라비아로 조금 늘어났고 지금은 1/6의 역할만큼 단계를 밟아나가는 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했다.
"무대보다 연습을 더 떨려하는 편인데 이번엔 오히려 연습때부터 집중이 잘 돼서 깜짝 놀랐어요. 정말 재밌고 행복하니까 주변을 신경쓰지 않고 올인할 수 있는 맘이 들었죠. 주연 되면 좀 바뀌나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그냥 비슷하게 느껴지고 똑같아요. 평소보다 관심가져주시는 게 새롭긴 한데 그냥 재밌고 신기하죠. 앙상블을 오래 하면서 지구력이 길러졌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힘이 정말 많이 됐거든요. 계속 오디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한 걸 느끼기도 했고요. 매번 다른 역할을 제 안에서 끄집어내고 찾아내는 걸 반복해오다보니 그런 경험이 확실히 안에 쌓인 것 같아요."
[서울=뉴스핌] 윤창빈 기자 = 배수정 뮤지컬 배우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 아티움에서 진행된 뉴스핌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04.28 pangbin@newspim.com |
아무리 뮤지컬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힘든 순간이 없지는 않았다. 연기 전공을 한 배수정은 연극으로 공연을 시작해 노래와 춤이 좋아 앙상블로 무대를 누볐다. 1년간 오디션에 내내 떨어진 적은 있었지만 '내 노래 한 번 해보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던 마음이 여기까지 온 힘이 됐다.
"그래도 연기하면서 제 노래 한곡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쉽지는 않았죠. '한곡만 노래 해보면 무대에서 내려와도 돼. 그걸 위해서 난 뭘 해야하지?' 그 고민을 계속 하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작품을 계속 해서 행복하긴 한데 앞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 땐 힘들었죠. 31살, 33살에 위기가 있었어요. 다 놓고 마지막 오디션 가면 커버를 해보겠냐는 기회가 왔죠. 또 한번의 위기가 왔을 땐 EMK 연출님께서 '뮤지컬 이제 안할 거야?' 하면서 오디션을 보라고 독려해주셨어요. 그때 한번 맘을 다잡았죠. 뮤지컬의 에너지는 어마어마하잖아요. 영화나 드라마 소개받아서 현장에 가면 뮤지컬배우들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냐고 할 정도로요. 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너무 사랑해요."
힘든 시간이 찾아와도 배수정은 뮤지컬 안에서 또 답을 찾고, 위로받았다고 했다. 그는 "공연을 함께 하는 우리끼리의 관계와 호흡이 있고 그 덕에 무대 위에서 살아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를 오래 지켜봐온 업계와 공연팬들은 '식스'의 입성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도 했다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최고로 신나는 공연과 순간을 만난 그의 다음 행보 역시 느리지만 분명하게 진행 중이다.
"'식스' 캐스팅이 공개되고나서 DM으로 '앙상블로 봤는데 타이틀롤 맡게 돼서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말씀을 해주신 분들이 정말 감사했어요. 예전에 보컬 선생님이 하고 싶은 역할과 공연명을 써두면 이뤄질 거라고 하셔서 '예술의전당, 지킬앤하이드, 루시'를 적어놨던 기억이 나요. 루시, 엘리자벳, 사틴도 마음으론 너무 하고 싶죠. 요즘은 뮤지컬이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고 형식을 다 벗어나 이렇게 소통하는 콘서트 형식 공연을 하니 정말 핫하게 느껴져요. 공연팬 분들도 코로나를 너무 오래 겪다가 맘 놓고 마스크 벗고 소리지르고 하니 더 좋아하시고요. 인이어를 뚫고 함성이 들리면 짜릿하죠. 지금은 공연의 경계가 다 없어졌고, 밖으로 막 발산도 해봤으니 깊이있는 연기와 캐릭터를 만나서 한번 더 성장하는 계기가 온다면 좋겠어요."
jyyang@newspim.com